逐玉 축옥 원작소설 제6장

제 6장

왕 포두가 떠난 뒤, 번장옥은 동생을 품에 안은 채 조 아저씨 부부와 함께 난장판이 된 집 안에 앉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아주머니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데릴사위라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니?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오면서 들어본 건,

돈 많은 부잣집 외동딸이 데릴사위를 들인다는 얘기뿐이야.

우리처럼 가진 것 하나 없는 집에 어느 누가 와서 데릴사위가 되려고 하겠니?”

번장옥은 묵묵히 앉아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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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포두가 내놓은 방법이란, 그녀가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올 사위를 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 아버지에게도 아들이 생긴 셈이 되니, 집안 재산은 자연히 그녀 차지가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송가에서 파혼하고, 천살고성이라는 악명까지 퍼진 뒤로는 그녀가 시집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하물며 데릴사위를 들인다는 건 더더욱 쉽지 않았다.

전에 그녀가 사람을 시켜 찾아가 보았던 송사꾼들 역시 아마 그녀 집안 형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데릴사위 들이기 라는 방법조차 그녀에게는 현실적인 방도로 여기지 않았던 듯했다.

세상 사람들은 원래 데릴사위를 수치로 여겼다.

사내가 일단 데릴사위가 되면, 조상 대대로 이어온 성씨까지 버린 것이나 다름없어 어디 가서도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평범한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건달들 조차 웬만하면 데릴사위는 되려 하지 않았다.

조아저씨는 굳은살 박힌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주름 깊은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혼인은 평생 가는 큰일이야. 아무 사람이나 붙잡아다 절부터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하면 나중에 고생하는 건 결국 장옥이 너 자신이다.”

조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자 더욱 번장옥이 가여워졌다.

다른 집 딸들은 혼인할 때 부모가 몇 번이고 사람 됨됨이와 집안 사정을 따져보고, 상대를 속속들이 살핀 뒤에야 번듯하게 시집보내지 않는가.

그런데 번장옥은 이제 부모도 없고, 당장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여야 하는 처지였다.

상대의 인품은커녕, 얼굴만 너무 일그러지지 않았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조아주머니는 눈물을 훔치려다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번장옥을 향해 물었다.

“네가 구해온 그 젊은이는… 집안이 있니, 없니?”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다시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네가 아까 말했잖니. 북쪽에서 피난 왔고, 식구도 이제 그 사람 하나 뿐이라고…”

번장옥은 조아주머니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지만,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아주머니는 번장옥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결국 말을 좀 더 분명히 꺼냈다.

“그 젊은이, 몸에 저런 상처를 입고 갈 데도 없다고 했잖니. 그러니… 내가 대신 가서 한번 물어볼까? 그 사람 뜻이 어떤지.”

아마도 이미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아주머니는 번장옥을 볼수록 그 젊은이와 잘 어울린다고 여겨졌다.

장옥이는 스스로도 능력 있는 아이니, 훗날 정말 그 젊은이가 폐인처럼 몸을 못 쓰게 된다 하더라도 혼자서 집안을 꾸려갈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송가에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온 뒤로, 조아주머니는 송연 그 은혜도 모르는 놈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얼굴마저 송연보다 훨씬 반듯하고 훤칠하니, 그녀 마음에는 더욱 흡족했다.

번장옥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만 말했다.

“조아주머니, 아직은 가서 묻지 말아주세요. 저 스스로 먼저 잘 생각해보고요. 정말 마음이 정해지면… 그때는 제가 직접 가서 물어 볼게요.”

조아주머니는 번장옥이 원래 자기 생각이 뚜렷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듣고는 더 권하지 않았다.

조아저씨와 함께 번장옥 집 안을 어느 정도 정리해준 뒤, 두 사람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번장령은 원래 낮잠 자는 습관이 있었고, 전에도 한바탕 울어서 지쳐 있었기에 잠든 뒤 번장옥이 침상으로 안아 옮겨 놓았다.

번장옥도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옆에 누워, 장막 꼭대기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송연과, 자신을 언정이라 소개했던 그 사내.

두 사람이 번갈아 그녀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녀와 송연은 어려서부터 혼약을 맺은 죽마고우였지만, 둘 사이에 남아 있는 기억은 의외로 별로 없었다.

송연은 늘 바빴다.

현학에 들기 전부터 그는 줄곧 책을 붙들고 공부만 했고, 두 집이 같은 골목에 살았지만 번장옥은 그 공부를 방해할까 봐 좀처럼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설령 갔다 해도, 대부분은 부모가 시켜서 송가에 뭔가를 갖다주는 일이었다.

때로는 고기였고, 때로는 과자였다.

그 시절 송씨 부인은 그녀에게 아주 상냥했다.

그러면서 늘 말하곤 했다.

송연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장차 급제해 번장옥을 호강시켜주려는 것이라고.

그 뒤 송연이 현학에 들어가자 학교에서 숙식이 모두 해결되었고, 집에 머무는 날이 더 줄어들었다.

번장옥이 그를 만나는 일도 한층 어려워졌다.

한 번은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 현성 장에 갔을 때였다.

송씨 부인이 송연에게 새 옷 한 벌을 지어 보내며,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은 번장옥이 처음으로 현학에 가본 날이었다.

그녀는 그곳의 학당이 정말 크고 번듯하다고 느꼈다.

문지기가 말을 전하자 송연이 나왔다.

그녀가 송씨 부인이 지어준 새 옷을 건네자, 그는 담담한 얼굴로 고맙다고만 했다.

마침 지나가던 동창 하나가 송연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송연은

“여동생이오.”

라고 답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번장옥의 마음은 답답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송연은 사실 자신이 찾아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약혼녀가 도살장 딸이라는 사실이, 아마 동창들 앞에서는 꽤나 창피했을 것이다.

사실 그때부터 번장옥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송연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혼약을 없애는 편이 낫겠다고.

하지만 부모는 송연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성실하고 앞길이 있는 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 송씨 부인도 그녀를 몹시 좋아했다.

늘 사람들 앞에서 말하곤 했다.

송연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때야말로 떳떳하게 번장옥을 며느리로 들일 수 있겠다고.

바깥사람들도 모두 그녀 복이 좋다고들 했다.

그래서 번장옥은 단 한 번, 사람들 몰래 송연에게 혼약을 깨고 싶다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당시 송연은 책을 보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좀처럼 흔들림 없는 눈을 들어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혼인은 부모의 명과 중매의 말로 이루어지는 중대한 일인데, 그대는 그것을 이토록 가벼운 일로 여기는 것이오?”

번장옥은 그의 그 말이, 혼약을 깨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 여겼다.

상대의 태도를 알고 난 뒤로는, 그녀 역시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부모의 죽음이었고, 송씨 부인이 찾아와 생년팔자가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파혼을 통보한 일이었다.

어쩌면 부모를 잃은 충격이 그녀의 슬픔을 모두 소진시켜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애초에 송연에게 품은 감정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와 다시 송연을 떠올려도 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자신이 구해온 언정이라는 사내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 사람 역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상처투성이에 갈 곳도 없는 시점에, 느닷없이 데릴사위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건 아무래도 은혜를 빌미로 보답을 강요하는 셈이었고, 상대의 곤경을 틈타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송연의 혼약 또한 결국은, 예전 부모가 송가에 은혜를 베풀었던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번장옥은 송연과의 혼약에서 겪었던 것 같은 불쾌하고 지치는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해보던 끝에, 그녀는 차라리 언정과 한번 상의해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정말 데릴사위가 되는 게 아니라, 겉으로만 데릴사위인 척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자신은 그저 집안 재산만 지켜내면 된다.

하면 된다.

그 사람이 상처를 회복한 뒤 떠나든 남든 그것은 그 사람 뜻대로 그가 떠나고 싶다면, 번장옥은 물론 붙잡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목숨을 구해주고, 그는 겉으로만 데릴사위가 되어 그녀의 난관을 넘기도록 도와주는 것.

그렇게 하면 서로 빚이 없는 셈이 된다.

그리고 만약 그가 남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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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장옥은 잠시 그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맑은 달과 막 내린 눈처럼 깨끗한 얼굴.

생각해보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시각 조가 다락방에서는, 막 해동청의 발목에서 편지를 떼어낸 사정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설마 자신이 감기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털빛이 새하얀 해동청은 갈고리 같은 두 발로 나무 창틀을 단단히 움켜쥔 채,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까만 콩 같은 눈으로 자기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정은 편지를 펼쳤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이내 입가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그자는 역시 자기 시체를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하루도 편히 못 지내는 모양이었다.

벌써 이렇게 서둘러 휘주 쪽 자신의 세력을 접수하러 사람을 보내다니.

하필 보낸 사람이 또 그 사람이었다.

사정은 편지를 침상 모서리의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편지는 금세 타올라 재로 변했다.

그는 침상 머리에 기대앉은 채, 활짝 열린 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이마 앞 잔머리가 흩날리도록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운 먹빛 같은 음울함만은 조금도 걷히지 않았다.

휘주의 병권을 대신 넘겨받은 그 사람은, 아마 경성의 그자보다도 더 그가 죽기를 바랄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옛 부하들은 스스로 몸을 사리기에도 급급할 터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그 야견 같은 자에게 냄새를 맡혀 이쪽까지 끌어들이고 말 것이다.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그는 이곳에 잠복하며 천천히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은 자기 옷깃에 새로 배어난 핏자국을 힐끗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기혐오와 짜증이 한층 더 짙어졌다.

“끼익?”

오랫동안 주인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으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해동청이 반대편으로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그 콩알 같은 눈으로 제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꺼져라.”

사정은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지나치게 창백한 탓에, 원래는 쉽게 드러나지 않던 연약한 기색이 그의 잘생긴 얼굴 위로 드러났다.

해동청은 이 말을 익숙하게 들었는지, 명령을 받자마자 만족한 듯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버렸다.

사정은 정말로 풍한에 걸리고 말았다.

번장옥은 오후 내내 그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일부러 반찬 두 가지를 볶고, 삶아둔 돼지머리 고기도 한 접시 썰어 함께 들고 그에게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락방 문 앞에서 몇 번을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되어, 곧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고서야 그 사내가 침상 위에 누워 있다는 걸 보았는데, 얼굴에는 비정상적인 홍조가 떠 있었고 사람은 몹시 흐릿한 의식 속에 빠져 있었다.

번장옥은 급히 조아저씨를 불렀다.

조아저씨는 맥을 짚은 뒤, 해진 의서 한 권을 펼쳐 한참이나 뒤적이더니, 가장 무난한 풍한 처방을 하나 적어주었다.

번장옥은 밤인데도 문 닫은 약방을 두드려 억지로 약을 지어 와 달인 뒤, 그에게 먹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기 시작했다.

다만 조아저씨가 사정의 땀을 닦아주고 약을 갈아줄 때,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붕대에 피가 제법 스며든 것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사정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아침이 거의 지나갈 무렵이었다.

열은 이미 내렸고 머리도 더는 어지럽지 않았다. 다만 목이 몹시 마르고 아팠다.

그 늙은 부부는 그가 물을 따르기 편하도록 침상 옆에 둥근 걸상 하나를 놓아두고, 그 위에 찻주전자와 거친 흙잔을 올려두었다.

사정은 몸을 지탱해 반쯤 일어나 물을 따르려 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번장옥이 큰 사발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차는 식었어요. 이제 막 열이 내렸는데 차가운 물 마시면 안 돼요. 제가 돼지 허파탕 끓여왔어요.”

조아저씨 말로는 돼지 허파탕이 열을 내리고, 기침을 멎게 하고, 폐를 촉촉하게 해준다 했다.

어제 잡은 돼지 내장이 한 통 남아 있었기에 번장옥은 허파를 꺼내 탕을 끓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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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은 목 쉰 소리로 고맙다고 한 뒤, 이번 음식은 적어도 창자는 아니라는 데서 안도하며 별다른 거리낌 없이 사발을 받아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입 마신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번장옥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 한 모금을 삼켜낸 뒤 물었다.

“이건 그대가 끓인 것이오?”

번장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

비록 이런 허파탕이라는 걸 끓여본 건 처음이었지만.

사정은 사발을 든 채 더는 마시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오.”

다만 조금 믿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앞서 먹은 비장면과 지금 이 돼지 허파탕이, 정말 같은 사람 손에서 나왔다는 것이.

번장옥은 권하듯 말했다.

“따뜻할 때 다 드세요. 조아저씨가 허파탕이 기침도 멎게 하고 폐에도 좋다고 했어요.”

사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좀 뜨거워서 그렇소. 조금 있다 마시겠소.”

그는 이쯤 말했으면 그녀도 슬슬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번장옥은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제가 아직 제 이름을 제대로 말씀드린 적이 없었네요. 저는 번씨 집안 장옥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그냥 장옥이라고 불러요. 앞으로 당신도 그렇게 불러도 돼요.”

사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이미 조아주머니가 그녀를 부르는 것을 들었기에, 전부터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그래서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억지로 말을 이어가려니 번장옥도 조금 민망했지만, 오늘 여기 온 목적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전에 성이 언, 이름이 정이라고 하셨죠? 그 언은 어떤 언이고, 정은 어떤 정이에요?”

사정이 답했다.

“말씀 언(言), 바를 정(正)이오.”

그러고는 번장옥이 글을 모르니 어떤 글자인지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찻잔 속 식은 차에 손가락을 적셔 침상 옆 둥근 걸상 위에 천천히 글자를 써 내려갔다.

‘言正’

이 두 글자는 그의 본래 이름에서 각각 한 부분씩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검지는 몹시 가늘고 길었고, 마디가 뚜렷하여 마치 푸른 대나무 같았다.

본래라면 붓을 잡으면 무척 잘 어울릴 손이었다.

하지만 손끝과 손등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빽빽하게 나 있어, 그가 전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손가락 끝으로 글씨를 쓰는 것뿐인데도, 글자에는 저절로 힘이 서려 있었다.

번장옥은 자기도 모르게 그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정(正)’ 자의 가로획이 마무리될 즈음, 그의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두 글자요.”

번장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예전에 글 읽는 사람이었나 봐요?”

그 글씨는 무척 훌륭했다.

송연의 글씨보다도 더 기품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정은 말했다.

“그저 무인에 불과하오. 어찌 감히 글 읽는 사람이라 하겠소.”

겉으로는 겸손한 말처럼 들렸지만, 묘하게 비꼬는 듯한 날이 서 있었다.

마치 그가 이른바 글 읽는 사람들을

몹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번장옥은 속으로 안도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예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사정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그녀가 유난히 캐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주고 또 몸을 추스를 곳까지 마련해준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를 묻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잠시 생각한 뒤 그가 말했다.

“변변한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오. 예전에 표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소.”

그러자 번장옥 얼굴에 뜻밖에도 기쁜 기색이 스쳤다.

“그거 참 인연이 있네요! 우리 아버지도 젊었을 때 바깥에서 표행하셨어요!”

사정은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

“…참으로 공교롭구려.”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표국 일에 관해 캐묻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맞잡은 채 잔뜩 긴장한 듯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혼인은 하셨어요?”

사정은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그의 시선 아래서 번장옥 얼굴에는 분명 어색함이 비쳤지만, 이상하게도 수줍음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잠시 헤아려보았으나, 결국 있는 그대로 답했다.

“아직 하지 않았소.”

번장옥은 손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금세 붉어질 지경이 되어서야, 마침내 체면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저기…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우리 집에 지금 좀 큰일이 생겼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큰아버지가 자꾸 우리 집 땅이랑 집을 차지하려고 해요. 어제는 땅문서를 억지로 빼앗으려다가 실패했는데, 이제는 아마 관아에 고소장을 낼 것 같아요. 만약 관아에서 판결을 내리면, 우리 아버지 슬하에는 아들이 없으니까 집과 땅은 큰아버지 쪽으로 넘어가게 돼요. 지금 그걸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가 서둘러 데릴사위를 들이는 거예요.”

사정의 눈꺼풀이 세차게 한 번 떨렸다.

“그대는… 나더러 데릴사위가 되라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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